오랜만에 비가 온다. 참 좋은, 착한 비다. 이번 비는 우리 부부에게 각별하다. 지난 이년간 요맘때쯤 내리 심었던 오미자 묘목 중 살아남은 게 별로 없다. 첫 해는 극심한 가뭄에 말라 죽었고, 이듬해에는 가뭄 끝의 기습 추위로 대개 얼어 죽었다. 당장 내일(4월 7일) 오미자를 심자고 새로 갈고 다듬은 밭에 단비가 내려주니 기쁘다. 매캐한 흙먼지를 마셔가며 일하면서 문득문득 혹독한 가뭄을 떠올렸던 것이 괜한 일이 되어 더더욱 홀가분하다. 아내와 함께 심자면 꽤나 고달픈 일일 텐데도 이젠 비가 어서 그쳐주었으면 하는 간사함마저 든다.
이렇듯 ‘참 좋은, 착한’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일이 있는 반면 ‘참 나쁜, 딱한’이라는 표현이 불쑥 튀어나오는 일도 있다. 지난 대통령이 농산물 유통의 어려움은 직거래로 해결하라고 하더니 이번 정권에서도 직거래 활성화를 주요 정책으로 삼을 모양이다. 물론 직거래는 농민과 소비자가 동시에 만족할 수 있는 좋은 유통 수단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핵심은 농산물 유통의 공공성 강화이다. 농산물의 수요가 개인 소비자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고, 품목에 따라 직거래로는 효율성이 떨어지는 경우도 많다. 기존의 유통구조에 대한 개혁의지가 전혀 없는 눈 가리고 아웅 식의 땜질 처방이고, 문제의식이 잘못 되었거나 의도적으로 외면한다는 혐의도 있어 보인다.
이번 대통령이 말한 농민들에게 FTA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다는 발언을 놓고 보면 그런 심증이 더욱 짙어진다. 농산물의 전면 개방을 앞두고 농민들이 피해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FTA에도 불구하고 이런 저런 정책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걱정 마시라고 하는 게 대통령의 도리 아닌가? 그리고 이해 당사자에 대해 피해의식 운운하는 것은 예의를 벗어나는 태도이다. 한 술 더 떠 우리 농업도 세계로 뻗어나가야 한다는 발언에서는 할 말을 잊는다. 주요 식량 자급률이 바닥을 긁고 있는 판에 한두 사례로 세계로 뻗어나간다 한들 우리 농업의 기틀이 얼마나 굳건해질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역대 정부 모두 지리멸렬 했던 농정인지라 벌써부터 새 정부에 대해 ‘참 나쁜, 딱한’이라는 말을 붙이고 싶지는 않다. 정부의 실패는 곧 국민의 실패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간곡히 바라건대 모래밭에서가 아니라 깊은 심연으로 자맥질 해 들어가 조개의 입을 어렵사리 열어 값진 진주를 찾아내는 정부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4년 후 우리 오미자의 붉은 과실과 더불어 그 마무리가 찬연하기를 - 제발, 부디, 하늘님이 보우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