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돼지고기 맞아?” 아내와
함께 퇴비사를 손보던 중에 땅거미가 진다. 애가 무심결에 삼키는 알사탕마냥 11월의 짧은 해가 꼴깍 넘어갔다. 이내 바람도
차다. 농막으로 돌아와 화로에 삭정이를 듬뿍 담아 불을 지른다. 불꽃과 함께 뜨거운 열기가 금세 일어난다. 참 좋다. 딱 이
정도, 이 만큼의 추위에 지피는 화톳불이 아슬아슬 서정적이라는 표현을 가능케 한다. 조금 더 기온이 내려가면 불을 피운다 해도
에이는 추위를 떨쳐내기 어렵다.
나는 숯을 만들 작정이었는데, 아내는 ‘직화구이’가 더 좋다며 특별한 돼지고기를 몇 점 석쇠에 올렸다. 불을 투명하게 비추는
살과 비계의 빛깔부터 범상치 않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눈 녹은 물처럼 불속으로 쏟아지는 기름 또한 예사롭지 않다. 아내보다
먼저 한 점 입에 훅 넣고 씹는다. 그리고 짐짓 심각한 어조로 말한다. “문제네. 이거 돼지고기 맞아?” 최고의 찬사로 하는
말이되 과장은 아니다. 이 탄성은 시쳇말로 Fact에 대한 것이다. 왕이 있다손 쉬 맛보기 어려울 돼지고기인 것이다.
김천시의 증산면에는 ‘막사발생태마을’이라는 농장이 있다. 이를 경영하는 부부는 귀농 10년차다. 이들의 주 생산물은 오미자다.
유기농 인증까지 받은 이 오미자는 해발 700미터에서 나는 것이라는 점에서 또 각별하다. 농장지기, 정인수씨는 몇 해 전부터
아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흑돼지를 기르고 있다. 이제는 그 사육 두수가 백여 마리를 훌쩍 넘기고 있다.
모든 농산물이 그렇듯이 그 맛과 품질은 재배방식에서 비롯되고, 재배 과정 자체가 농작물의 가치를 입증한다. 살아 있는 것을
조정, 통제, 관리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일반 공산품과 극명하게 구별된다. 한 마디로 인위적인 노력으로만 양질의 농산물을 생산할
수는 없다. 그저 편리하게 말하자면, 사람과 농작물 사이에 일정한 조화와 균형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가축사육에는 미묘한
교감까지도 보태어져야 한다. 물론 현실은 그렇지 못함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를 탈출해 출산한 어미 돼지
정인수씨는 흑돼지 사육을 시작하기 전에 전국의 돼지 사육환경을 돌아보며 밑그림을 그렸다. 처음에는 농사와 마찬가지로 당연히
유기축산을 염두에 두고 그에 걸맞은 사육방식을 조사했다. 그러나 곧 포기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유기축산의 핵심인 유기사료를
거의 전량 수입해야 한다는 현실 때문에 그랬다.(실제로 우리나라 축산에서 소비되는 사료의 90% 이상을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유기축산 흑돼지 사육이라는 목표가 허망하게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청정 돼지를 사육한다면서 사료를 전량 수입해서 쓰는
것은 도저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대안을 찾아 나섰다. 선구적으로 친환경 사육을 하는 몇몇 축산
농가를 엄밀히 연구했다. 그러나 거기서 얻은 결론도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았다. 도축과 유통에서 대규모 축산의 관행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어 일정 부분 타협하고 있었다. 시중에 유통되는 ‘규격돈’처럼 호르몬제 등이 섞인 가공 사료를 돼지에게 먹여 돈당
체중과 육질을 기준에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왕 할 일이라면 어중간하게 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기존의 친환경 흑돼지 농가에서 하는 사육방식에서 친환경 개념에 부합하는 부분만 채용하기로 했다. 주 사료는 국내산 청치(=설미,
푸른 빛깔의 미성숙 쌀로 100%현미라고 할 수 있다.)와 등겨(미강), 자가 생산한 오미자 발효 부산물 등을 섞어 유황을
첨가해 숙성시킨 것(유황발효미강)으로 삼았다. 보조 사료로는 매일 들에서 잡초를 베어 먹이고 겨울철에는 짚, 낙엽 등을 주기로
하였다. 항생제와 호르몬제, 가공된 사료나 영양제는 전혀 쓰지 않기로 했다. 또 인공수정은 배재하고 자연 교미 번식을 유도하기로
했다. 규모는 최대두수 3백여 마리로 정하여 두당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는 소규모 축산을 지향했다.
이런 원칙을 지키며 길러낸 성돈은 중량이 80kg 정도였다. 공장식 축산에서 생산된 것에 비해 약 20kg 덜 나가는
체중이었다. 정인수씨는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제조 사료와 약제를 전혀 쓰지 않고서도 오히려 더 건강한 돼지를 길러냈다는
자부심도 들었다. 그는 자신의 사육방식에 ‘소규모자연축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소규모’는 노동과 관리 면에서 두 부부가
감당할 수 있는 최대 규모를 말하는 것이고, ‘자연’은 그저 내맡겨 둔다는 뜻이 아니라 자연의 원리에 최대한 충실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돼지에게 먹이는 대부분의 사료를 농장과 그 주변에서 자급하겠다는 목표가 담겨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농사까지
아울러 ‘자연순환농법’으로 가겠다는 강한 의지도 배어있다.
아내와 함께 막걸리를 곁들여 먹는 고기가
바로 이런 사연이 담겨있는 돼지고기다. 사육 흑돼지의 자발성을 극대화하는 먹이와 환경을 제공하려는 정인수씨의 의지는, 사람에게
안전하고 보다 맛있는 먹을거리를 제공하겠다는 신념과 다르지 않다. 이런 점은 우리 부부의 농사인식과 다르지 않기에 공감하고, 또
부닥치는 어려움도 이해한다. 재배, 또는 사육되는 동식물은 엄연히 살아있는 것이기에 사람의 뜻을 순순히 따르지만은 않는다.
조화, 균형, 교감에 이르기는 정말 어렵다. 그런 것들이 가능한가라는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 객관적인 기준이나 원칙을 합리적으로
계산해내 다른 이에게 설명하기조차 어렵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의 목적은 뚜렷하다. 사람이 먹어서 안전하고, 맛있을 뿐 아니라
고유의 특성을 최대로 발현하는 작물과 가축을 기르는 일이다.
정인수씨는 최근 흑돼지 고기를 모두 직거래
방식으로 첫 출하하여 전량 소진하였다. 그는 사료자급률을 높이는 일이 당면과제라고 말한다. 검증 가능한 사료 확보에 어려움이
크기 때문이다. 이는 일정한 양산체제를 갖추는 데에 걸림돌이 되고 있기도 하다. 더구나 자연축산흑돼지 시장을 형성하려면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뜻을 같이 하는 농민과의 연대가 절실한 것이다. 그러자면 또 사육방식에 대한 표준 매뉴얼이 나와야 한다.
막사발생태마을은 지금 새 돼지축사를 짓는 공사로 분주하다.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지어지는 친환경 축사가 아닌가 한다. 해발 700m에서 벌이는 두 부부의 고공행진이 아름답다.
직접 가서 보면 아기 돼지들이 어찌나 이쁘던지요~~
'나 이거 딱 한달만 키우다 드리면 안될까요?' 했더니 그러라네요 ㅋ
정말로 그러고 싶긴 한데요.. 글쎄요.. 어쩔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