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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 안녕하십니까?

덤바우잡설 조회 수 21714 추천 수 0 2013.12.20 14:51:04
  안녕하세요? 저는 농사꾼입니다. 들판에 그 많고 키도 크던 풀은 된서리에 진작부터 납작 엎드렸고, 개울물은 두꺼운 얼음장에 소리를 잃었습니다.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앞산이 훤하고, 먼 산비탈에서 어기적거리는 고라니의 깡마른 정강이마저 보이는군요. 확 트여 눈이 시릴 정도입니다. 다만 뺨을 에는 찬바람 마다 않고 자두나무 가지치기 하느라 아내의 팔이 안녕치 못해 좀...

 ‘안 녕들 하십니까?’, 대자보에서 저는 생뚱맞게도 ‘들’에 꽂혔습니다. 마을 어르신들의 말씀들 중 가장 운치 있는 말이 ‘들에 나간다.’인데요. 밭에 일하러 가는 것을 그렇게 표현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삽이라도 하나 어깨에 걸고 ‘나, 들에 나간다.’ 일하러 간다. 농사지으러 간다. 그러나 들은 사람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뿐더러 도무지 그 속조차도 알 수 없군요. 원님이라면 도대체 장단을 맞출 재간이 없고, 애라면 망나니짓이 과해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두들겨 패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다른 농민은 모르겠으나 저는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댁의 들은 안녕하시냐고 자주 묻습니다.

 그랬습니다. 풋내기 농사꾼이 보기에 땅과 흙, 들과 산, 거기에 깃들어 사는 온갖 기고 나는 벌레들, 그리고 천변만화의 날씨. 이 모든 것들이 못되다 못해 고집불통에 흉포한 나라님을 닮았다고 여겼죠. 농사랍시고 짓다보니 그랬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못된 나라님이든 압제자든 그 이름으로 불리어야 할 자는 바로 저 자신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뭐, 그게 무어든 있는 대로 거두지 않고 지어먹거나 만들어 먹는 종족이 사람 밖에 없다는 데에 비추어 보자면 인류가 제 공범이기도 하겠으나, 어쨌든 말입니다.

 농사가 사람 먹이는 업이라 소중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만, 들에 깃든 다른 생명들의 입장에서는 가혹한 상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작물의 풍요로운 생산을 위해 농민들이 흘리는 구슬땀이 오히려 그들의 삶을 위협할 뿐 아니라 작물에도 오히려 해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퍼부어지는 엄청난 두엄과 퇴비, 비료, 농약이 사람의 기대와 달리 들을 초토화시키는 독이 되기도 합니다. 생태계에 대해 여전히 일천한 지식밖에 없는 인간의 아집과 독선으로 인해, 우리의 경작지가 고갈과 과잉의 극단적 불균형에 빠져 있다고 많은 이들이 경고하고 있기도 합니다.

 저는 이제 지천으로 자나라는 풀과 나무, 공들여 기르는 작물들을 사랑스런 자식이나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정과 통제의 대상으로도 바라보지 않습니다. 자연을 벗 삼는다는 따위의 감정이입을 배제하고 그들의 반응(행동)을 제 잣대로 재단하지도 않을 작정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우리 헌법 제1조 2항, ‘대한민국(들)의 주권은 국민(깃든 것들)에게 있고, 모든 권력(생산)은 국민(깃든 것들)으로부터 나온다.’를 들에 선언하여 그 존재가치를 인증하고 싶지만, 한갓 사람의 오만일 뿐이겠죠.

 들을 ‘통치’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후로는 놀랍게도 제가 자유로워짐을 느꼈습니다. 들에 의탁한 그만큼 제게 자유가 찾아온 것 아닌가 합니다. 덕분에 당장은 수확이 줄고, 병충해가 더 심해지기도 합니다. 대신 수확한 것들은 제 본연에 합당한 자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앞으로 들과 제가 따로 또 같이 가는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겠으나, 내맡길 것은 내맡기고 도리는 도리대로 찾아 가다보면, 기꺼이 함께 닿을 곳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하물며, 하물며 말입니다. 국정을 책임지는 자리는 말도 뜻도 통하지 않는 들을 상대하는 자리가 아니잖습니까? 그 대상이 의사가 있으면 소통이 되고 갈등이 있으면 조정이 되며, 이해가 생기면 관계를 형성하는 시민사회잖습니까? 제 앞에 펼쳐진 그 ‘들’이 목숨을 걸고 행사하는 주권을 찍어 누르면서 제초제를 막무가내로 뿌려댄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이미 시작된 환경의 돌이킬 수 없는 반격에 직면할 것입니다. 자연이 그럴진대 우리 정부가 지금처럼 험상궂게 윽박지르기를 일삼다가는 미구에 감당치 못할 저항에 좌초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들, 새해에는 우리 모두가 들과 함께 기필코 안녕하기를 진심으로 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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