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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외계인이 될 수 있다

어쩌다한마디 조회 수 9228 추천 수 0 2010.01.02 01:27:29
당신도 외계인이 될 수 있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1969년. 인간이 최초로 달에 발을 디딘 해다. 그것이 생중계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만화방을 지나치다가 흑백 TV의 푸릇한 화면에서 얼핏 우주인을 본 기억이 있다. 그 사건으로 가족을 비롯한 주변 어른들이 무척 흥분하고 들떴던 것 같았으나, 정작 그 해에 나를 화들짝 놀라게 하였던 사건은 따로 있었다.

 나는 어린 시절 대부분을 서울의 성동구(지금은 중구) 신당동에 살았다. 주택가는 ‘수도국산’ 기슭부터 아랫도리까지 판자촌이 밀집해 있었다. 온 나라가 가난에 허덕이던 시절이라 그곳 사람들의 삶은 더욱 팍팍하였다. 남자들은 온종일 막일을 찾아 거리를 헤맸고, 집에 남은 사람들은 편지나 종이봉투를 접고 붙이는 잔일을 해 생계를 도왔다. 나는 그렇게 사는 학교 친구 집에 자주 놀러갔다. 그 집 할머니가 유난히 예뻐해 주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된장찌개 맛이 너무 좋아서 그랬던 것 같다.

 어느 날, 여러 친구들과 그 집 주변에서 놀다가 나는 ‘수도국산’의 기슭에 난 굴을 하나 발견했다. 좀 떨어진 곳에 살던 나는 그것을 처음 보았으나 다른 아이들은 이미 그곳을 알고 있었다.    

 “일제 때 만든 방공호래.”
 “저기, 들어가면 안 돼. 사람 잡아먹는 할망구가 산대.”
 “작년에 동네 아이가 없어졌는데, 나중에 옷이 굴 앞에 버려져 있었대.”
 “문둥이들이 산다던데?”

 이런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아이들은 굴 앞을 기웃거렸다.

 “이거 저기, 남산까지 뚫려 있어.”
 “끝가지 가봤어?”

 이 말이 도화선이 되어 갑론을박하던 아이들은 그곳에 들어가 보기로 하였다. 바로 집 곁이었는데도 아이들 중 거기에 들어가 보았다는 친구는 없었다.

 굴 안에서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한 걸음 들어가자마자 찬 기운에 이마가 싸늘해지는 음습하고 컴컴한 곳이었다.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지하수에 바닥은 질펀했고, 척척했다. 곰팡내와 음식냄새가 뒤섞인, 썩는 냄새가 코를 찔러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양 옆으로 더러운 천이 가림 막으로 늘어져 있었고, 그 틈으로 촛불이 벌건 빛으로 흘러나왔다. 그리고 웅크린 사람들의 눈빛이 날카롭게 희번덕거렸다.
 문자 그대로 빈민굴이었다. 아이들은 겨우 열 발자국도 가기 전에 뒤돌아섰다. 그리고 뒷덜미가 잡힐세라 앞을 다투어 굴 밖으로 나왔다. 그 후로 오랫동안 나는 그 굴 안에 정말 사람을 잡아먹는 할망구가 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그들은 어둔 밤을 타고 나와 어딘가에서 몹쓸 짓을 하고 있으리라는 불안한 공상에 자주 빠졌다.

 세월이 지나고, 신당동을 떠나 살면서 그 일은 기억에서 지워지는 듯했다. 그러나 1980년대 초 어느 날, 술에 취한 나는 한 밤중에 그 굴 앞에 섰다. 어떤 막연한 그리움에 발길이 신당동으로 향했던 것인데, 나는 곧장 굴 앞으로 갔던 것이다. 아직도 그 사람들이 그 안에 살고 있을까? 이번에 들어가면 그 끝까지 가볼 수 있을까? 굴 발치로 걸어가며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굴은 그 입구가 콘크리트 옹벽으로 막혀있었다. 여전히 그 사람들이 그 안에 살고 있을 거라는 엉뚱한 짐작에 입구 주변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보았다. 옹벽 앞에 붉은 벽돌을 쌓아 만든 화단이 있었다. 이름을 알 수없는 꽃이 조금 멀리 있던 방범등에 비쳐 보랏빛으로 빛났다. 나는 그 꽃을 한참 멍하게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어디로 갔을까?’

사라져간 사람들

 ‘광주대단지 사건.’ 1971년 8월 1일에 터진 사건이다. 발단은 서울시가 시내에 사는 판자촌민을 경기도 광주로 강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대상은 주로 청계천이나 돈암동, 아현동에 살던 사람들이었다. 대략 일만여 세대에게 허허벌판의 땅, 8평을 무상으로 주며 집은 알아서 짓고 살라는 것이 이주정책의 요지였다. 그들은 한 겨울에도 천막을 짓고 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인적 없는 들판에서 생계수단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은 이주가 아니라 차라리 추방이었다.
 이에 분노한 이주민들이 집단으로 항의하는 과정에서 20여 명이 구속되었다. 그러나 커다란 사회문제로 비화되지는 않았다. 그 시절이 얼마나 엄혹한 독재체제였는지는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다만, 나는 궁금하다. 신당동 굴에 살던 사람들이 그들 사이에 끼어 있었을까?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도시재개발은 업자들, 다시 말해 토지와 주택을 볼모로 자본을 무한증식하려고 혈안이 된 투기꾼들의 손에 넘어갔다. 통제와 조정은 불가능했다. 아니 오히려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조장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상계동 철거’ 투쟁이 발생했다. 당시 나는 그 지역에 이웃한 공릉동에 살고 있었다. 현장에는 싸움이 다 끝난 다음에나 가볼 수 있었는데, 6.25 기록 영화에서 보던 폭격 맞은 도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상계동 173번지에 살던 사람들은 당시로부터 20년 전에는 지금의 세운상가 자리에 살던 이들이다. 도심에서 내몰린 이들은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을 앞두고 다시 거리로 쫓겨나게 되자 격렬하게 저항했다. 철거반원과의 충돌에서 어린 아이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싸움은 치열했다. 그러나 결국 120세대의 터전에는 상계역이 들어섰고, 그들은 부천의 고강동과 남양주의 별내면으로 이주하여 공동체 생활을 하였다.(지금은 대부분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불행히도 우리 사회에서는 강제철거와 퇴거는 여전하다. 만연해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지도 모르겠다. 퇴행적인 자유주의와 약탈적 자본주의를 대변하는 소유권 만능이라는 치졸한 관념이 사회를 지배한다. 사회 구성원에 대한 기본적인 생존권이나 인권보다는 경제적 이해관계가 우선된다. 정부는 조정과 통제, 진전된 정책개발에는 관심도 없다. 오히려 사회적 약자를 윽박지를 뿐 아니라 필요하다면, 사회전복세력으로 매도한다.

 유엔의 사회권규약위원회는 1995년 우리나라에 대해 대책 없는 강제 퇴거를 중단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한때, 남아프리카공화국과 함께 가장 잔인한 강제 철거를 하는 나라로 꼽히기도 했다. 이러한 국제 사회의 비판에 우리나라는 늘 ‘테러 진압식’ 강제철거로 응답했다.

 2009년 1월 20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 2가 상가건물 옥상 망루에서 참사가 일어났다. 같은 날 12시 20분, 마지막 시신이 발견되면서 ‘전쟁’은 끝났다.
 망루 투쟁의 직접적 원인은 철거민과 조합 간 보상비 갈등이었다. 재개발조합 측은 세입자에게 법적으로 규정된 휴업보상비 3개월분과 주거 이전비 4개월분을 지급한다고 통보했다. 세입자들은 턱 없이 적은 보상비를 올려줄 것과 대체 상가를 보장할 것을 요구했으나 묵살 당하자 망루농성에 들어갔다. 그러자마자 공권력은 이들을 도시 게릴라로 규정하고, 경찰 특공대를 동원하여 강제 진압에 들어갔다.

 철거민 5명과 경찰 특공대 1명이 죽고, 23명이 부상을 입었다. 농성자 중 5명이 구속되었고, 15명이 불구속 기소되었다.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서울시가 겨울철 철거 금지라는 자체 규정까지 어겨가며 조급하게 일을 추진하지만 않았더라도, 공권력이 조금만 더 중립적이었더라도 이러한 참사만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했더라면, 그처럼 불행한 일이 생기지 않았을까?

 우리의 철거 역사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대규모 철거에서 단 한 번도 철거민의 이주와 생계대책이 사전에 마련된 적이 없다. 용산참사 후에 철거대책이 보완되었다고는 하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이른바 영국,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강제철거라는 말이 아예 사라졌다. 우리가 결코 경쟁상대로 생각하지 않는 타이조차도 CODI라는 정책으로 무주택 빈민을 돕고 있는데, 800여만 명이 그 혜택을 받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참사에 희생된 분들뿐 아니라 이미 합의 하고 용산을 떠난 763명의 세입자들도 기억해야 한다. 불가피하게 경제적 타격을 받은 이들이 새로 잡는 터전이 안정적일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지 않아야 하겠으나 상황이 지금과 같다면, 그들이 또다시 퇴거와 철거의 악몽에 빠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용산 4구역, 또는 District9

 지난해에 개봉했던 'Dstrict9'은 외계인을 소재로 한 영화다. 외계인들이 지구에 도래한 상황에 초점을 맞춘다. 그들의 불시착과 수용, 주거를 둘러싼 지구인과의 갈등이 줄거리의 대분을 차지한다. 감독, 닐 블롬캠프가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이고, 무대 역시 같은 나라의 요하네스버그 부근이라는 것은 보는 이에게 금세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라는 인종차별정책을 떠오르게 한다. 영화 제목과 비슷한 ‘District6’는 남아공에 실제로 있었다. 1966년 정부가 이곳을 백인전용지구로 선포하면서 6만 여명의 흑인을 인근지역으로 강제 이주했던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흑인집단거주지역이 소웨토Soweto이다. 영화와 관련한다면, 장차 외계인이 강제이주 될 ‘District10’쯤 되는 셈이다.

 “국제조약에 따르면 24시간의 퇴거 시한을 줘야 한다.…퇴거 통지서에 서명을 받아라.”

 이런 지침을 받은 공무원이 중무장한 군인들과 동행한다. 그 후에 벌어질 일은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오래 전부터 익히 봐왔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퇴거가 진행된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신당동의 굴에서 비롯된 철거의 이미지가 떠올라 가슴이 서늘했다면, 내가 너무 감상적이어서 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당신도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살던 경계 밖으로 추방당하는 외계인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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