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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떠난 인동초

어쩌다한마디 조회 수 8821 추천 수 0 2009.08.19 01:32:39

여름에 떠난 인동초




 시골 생활을 시작한 첫해 이른 봄, 장모님께서 한 덩굴줄기를 가리키시며 이게 인동초다라고 말씀해주셨다. 저절로 ‘김대중’이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비쩍 마른 줄기에 시들다 만 이파리가 다문다문 달려 있는 모습이 무척 지쳐 보였다. 누렇게 말라 죽은 풀들 사이로 감아 뻗은 줄기들은 무얼 안을 수나 있을지 군색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인동초로 불렸다면, 바로 이런 모습의 정치역정을 표상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모님과 함께 다시 그 자리를 찾았을 때에는 겨우내 껑더리된 인동초 대신 온갖 풀들이 훨훨 살아나 있었다. 인동초의 줄기와 잎을 쉬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이게 금은화에요.”

 지금도 여전히 사위에게 존대하시는 장모님께서 말씀하셨다. 실제로 날렵하게 갈라진 꽃이 희기도 하고 노랗기도 했다.

 “금은화요?”

 인동초를 찾겠다고 두리번거리며 이렇게 묻자,

 “호호. 이게 인동초라니까요, 하얗게 피었다가 노랗게 지는.”

 아아, 그랬다. 그 모양이 이 하늘을 나는 학과 같다 하여 ‘노사등’이라고도 불린다는 인동초 꽃이 짙푸르게 살아나는 풀들의 어깨를 딛고 희고 노랗게 꽃 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꽃잎들을 장모님과 함께 따다가 말렸다. 그리고 뜨거운 물에 넣어 차로 마셨다. 커피와 담배, 술에 늘 먹먹한 입안에 달보드레한 맛이 퍼졌다. 생전 처음 먹어보는 꽃차이자 인동초꽃차였다. 이것저것 꽃차를 마셔본 지금에서 와서 보면, 쓰지도 화하지도 않으면서도 제 맛은 그대로 간직한 것이 인동초 꽃차인 것 같다.

 뒤늦게 고인의 소식을 접하고 잠시 우두망찰했다. 한 해 전직 대통령 두 분을 잇달아 잃는 불운한 시민이 되고 말았다. 민주화의 역군이자 그 결실이었던 두 대통령이 이끌었던 십 년은 그들이 가기 전부터 이미 폄훼되고, 훼손된 바 있다. 그러니 우두망찰에 선득거림마저 느낀들 과장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불운은 이제 그 시작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올해는 장모님이 안 계신 탓인지 인동초 꽃차를 만들지 못하였다.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그게 애 끓일 일이 되어버렸다. 기억함에 연상이나 매개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당신을 추억함에는 인동초 꽃차가 꼭 있어야 한다는 헛고집이 든다. 그것이 없어 그를 제대로 추도할 수 없다는 억지가, 그 못된 아집이 애통함에 앞선다.

 긴 세월 ‘김대중’이라는 이름에 ‘인동초’를 달아 사람 대신 신념으로 기려왔으되, 앞으로는 ‘인동초’에 ‘김대중’을 매달아 차향으로 피워올려야겠다. 그리하여 그가 현재에 남아 있는 과거, 역사임을 늘 부릅뜨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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