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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이 싫어요? - Happy-Go-Lucky(2008)

추억에 대한 예의 조회 수 10279 추천 수 0 2009.06.15 20:12:57
 
설탕이 싫어요? - Happy-Go-Lucky(2008)

 포피라는 이름의 여자. 서점에서 ‘The Road To Reality’라는 제목의 책을 보며 중얼거린다.

“Don't wanna be going there.”  

 그러고 나서 무뚝뚝해 보이는 점원에게 끝없이 말을 건다.

 “하이!”

 “고요의 오아시스네요. 밖은 북새통인데”

 “그래도 멋진 날이죠, 응?”

 “여긴 처음인데.”

 “쓰신 모자가 맘에 드네요.”

 “바빠요?”

 “여보세요?”

 “오늘 힘들었어요?”

 “아뇨.”(점원의 유일한 대꾸)

 “내가 오기 전까진 아니었군요, 네?”

 “전조등에 놀란 토끼 같네요.”

 “물어뜯지 않을 거에요.”

 “걱정하지 마요. 지금 가요.”

 “좋은 하루 되세요. 행복하시고요.”

 “아무것도 안 훔쳤어요. 정말이에요.”

 “삐, 삐, 삐, 삐”(도난 방지 경고음을 입으로 흉내 냄.)

 이것이 사람들을 대하는 포피의 태도다. 언제나 그렇다. 수다스럽고, 늘 고개를 까딱이며 웃는다. 일마다 농담 한마디씩은 던진다. 그런데 같은 방을 쓰는 친구 외에는 포피의 그런 장단에 맞장구치는 사람이 별로 없다. 남자 친구도 없다. 그렇다고 포피가 좀 모자라는 여자는 아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다.
 자전거를 잃고도 “작별 인사도 안 했는데….”라던 포피에게 강적이 나타났다. 운전을 가르치는 스캇이다. 그는 음모론을 믿는 듯한 완고한 원칙주의자이다. 앞도 없고, 뒤도 없이 마냥 낙천적인 포피는 금세 스캇의 심기를 긁는다.
 운전강습 내내 끝없는 말다툼이 벌어진다. 사실 말다툼도 아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벽에 대고 하는 독백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이해도 없고, 관용도 없다. 따져보면, 즐겁게 살자는 또, 웃으며 살자는 포피가 비난받을 일은 없어 보인다.

 처음에는 포피의 천친 난만한 낙관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현실은 이런 것이다며 훈계를 하는 스캇이 딱해 보인다. 소시민의 궁색하고 빤질빤질한 자존심이 다 드러난다. 강습이 반복되면서 사정이 좀 달라진다.

 스캇이 운전에 적합하지 않다고 다른 신발을 신을 것을 몇 번이나 강권하였으나 포피는 절대로 굽 높은 하이힐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건 스캇의 집요함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포피의 옷조차도 그렇다. 1980년대 풍의 그물 스타킹을 단 한 번도 벗는 적이 없다.

 마침내 스캇과 심각한 언쟁이 벌어진다. 차에서 내려 외쳐대는 스캇에게 포피가 말한다.

 “우리가 이 마을의 평화를 깨고 있잖아요.”

 포피의 브레이크 없는 농담의 행진이 스캇의 평화를 깬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은 마음이 드는 대목이다.

 어쨌든 원하지 않는 사람과의 비극을 빚은 포피는 이에 굴하지 않는다. 포피는 사람들이 원하거나 말거나 요술 방망이라도 있는 것처럼 끝없이 설탕을 뿌려댄다, 고개를 까딱이며, 또 그때마다 환한 웃음을 날리기도 하며.

 그 인상이 너무도 뚜렷하여 행여 아직도 그러고 다닐 포피가 걱정스럽기도 하고, 그것 또한 위선은 아닌지 스캇의 자세도 취해보다가, 마침내는 제발 그 모습 그대로 변함없이 거리를 활보해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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