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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이굽이 한 고비

덤바우잡설 조회 수 18070 추천 수 0 2012.09.30 22:58:20
 산길에서는 멀리 보이지 않는다. 당연하다. 산길이라는 것이 대개 산허리와 계곡을 가로지르며 나있기 때문이다. 산등성이를 돌면 또 다른 산모롱이가 보이는 식이다. 이런 길을 무람이 걷다보면 산마루도 만나고 깊은 골도 만나게 된다. 때론 가파른 오르막과 내리막이 꽤 있는 길도 만나게 되지만, 이는 대개 산마루를 겨냥하여 사람이 닦은 길이다. 애초에 들짐승들이 통행로로 냈을, 사람 발두께보다 좁은 산길은 돌아갈지언정 가로지르는 법이 없다.

 사람 사는 일이 이런 산길과 다르지 않다. 온갖 사념으로 지어놓은 내일에 관한 설계는 분명 굽이 너머 그 너머, 너머의 한 군데를 지목하고 있으나 단 하나의 굽이 너머의 정황을 제 대로 알 길이 없다. 사람 사는 일의 역사가 꽤나 깊은 탓에 이 알 길 없음에 순응하거나 적응, 또는 도전하자고 사람스러워 문화적인 이벤트를 마련했다. 8월 한가위가 그런 것 중 하나라고 나는 믿는다. 굽이와 굽이 사이에 한 고비를 끼워 넣어 분수령을 삼는 지혜말이다.

 내가 사는 김천은 올해 거푸 내습한 태풍으로 꽤나 큰 피해를 입었다. 둑이 터져 시내 일부가 잠겼을 뿐 아니라 외곽 도로 곳곳이 침수, 매몰되어 교통이 두절되기도 하였고, 거의 전 지역에서 크고 작은 산사태가 발생했다. 그저 모래밭이 되어버린 논과 나무 허리까지 잠겼던 과수나무들, 이제는 마른 토사를 허옇게 뒤집어쓰고 말라가는 채소류를 보는 게 일상이다. 집이 통째로 사라져버린 이도 있고, 거기에 세 들어 살던 사람은 빈손으로 길로 나앉았다는 말도 들었다.





 우리 부부가 농사를 짓는 덤바우도 사정이 다르지 않아 그저 실개천이었던 물이 불어나 개천을 따라 난 밭 귀퉁이를 모조리 쓸어가 버렸다. 손으로 들기 역부족인 바위들이 쌓이고, 깊게 패인 개천 너머의 밭으로 관리기도 들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피해는 김천에서 피해 축에도 못 낀다. 그런데도 7순이 넘은 마을 이장님과 그에 버금가는 어르신들이 면 직원을 앞세워 찻길 끊긴 덤바우로 올라와 피해조사를 했다. 우리 부부는 그것만으로도 고마웠고, 노인 분들에게 맡길 일이 아니라 면구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진바실 마을 사정을 거의 모르는 내가 나선들 뭐가 제대로 될까 싶은 마음이었다. 나는 이후 진행된 마을 어르신들의 피해조사와 응급복구과정을 보면서 누군가의 말처럼 과연 전문가는 문제 해결 능력이 뛰어난 사람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절감했다. 그 분들의 느려 보이지만 끈덕진 실천적 연륜에 고개가 숙여진다.







 그런 굽이 사이에서 한가위라는 고비를 맞았다. 복구라는 것은 늘 인프라에 해당되는 말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큰물에 한 번 할퀸 농경지의 진정한 복구는 몇 해에 걸쳐 진행될 수밖에 없다.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은 풍요로운 한 순간을 경탄하자는 뜻은 아닐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위로이자 새 희망의 계기로 읽혀져야 할 것이다. 아니, 피해에 상심한 모든 농민들에게 그런 날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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