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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고추 품질은 좋겠네

덤바우잡설 조회 수 14410 추천 수 0 2012.08.07 13:01:31
올 고추 품질은 좋겠네

“고추가 좋으면 뭘 해. 잎이 다 타고 있구먼.” 
오랜만에 밭에 들르신 장모님께서 고추를 보고 나서 하시는 말씀이다. 요즘 내가 지겹도록 하는 말인데도 가슴이 철렁한다. 

속수무책이다. 물이라도 대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은 물정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우리 덤바우가 말 그대로 대놓고 물을 줄 형편도 아니지만, 요즘 같은 날씨가 이처럼 오래 지속될 때에는 물도 독이 될 수 있다. 고추들이 어설피 목을 축였다가는 견딜힘을 잃고 조갈증에 지레 타버리기 십상이다.

마을 고추밭 하나는 진작 모조리 타버렸다는데, 우리 것은 아직 고사한 놈은 없어 그나마 다행이다. 다행이라지만, 그 기한은 그리 길지 못할 것이다. 이런 걸 불행 중 다행이라고 불러야 하나? 대낮 더위에 하는 일은 일도 아닌지라 밭가로 난 좁은 계곡에 웅크리고 앉아 공염불이나 다름없는 소리나 웅얼거리며 뙤약볕을 피했다. 물에 앉아 있으니 고추에 미안했던지 아내가 그래도 물을 주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고 한다. 나도 생각 같아서는 계곡을 번쩍 들어 옮겨 고추밭 고랑에 구불구불 흐르게 하고 싶다.



진작부터 하얀 고추 꽃이 가물에 콩 나듯 한다. 꽃이 피지 않으면 그 마디는 그저 빈자리가 된다. 고추가 타죽는 흉사는 면한다 해도 폭염이 올 소출의 많은 부분을 덜어 가버릴 공산이 큰 것이다.

날이 이런 탓에 고추나무 무르팍에 매 달린 첫물 고추는 잘도 익는다. 아내는 땡볕에도 아랑곳없이 고랑에 쪼그리고 앉아 첫 수확을 하고, 나는 염천에도 목숨을 부지하는 이런저런 병충을 방제할 농약을 조제했다. 해거름인데도 땀은 비 오듯 쏟아진다. 가뭄 든 계곡이라 물이 적어 물 받는 데에도 시간이 부쩍 더 걸린다. 

첫 수확. 고추 20여 kg. 이걸 말려 얻게 될 건 고추는 대략 5근. 대충 보이는 것만 따서 얻은, 장한 수확이다. 

받아 놓은 물에 우선 탄저병 들지 말라고 자두식초를 넣고, 이런저런 약효가 있다는 양파와 마늘 우린 물을 또 붓고, EM효소도 듬뿍 섞었다. 게 껍데기 칼슘은 넣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만 두었다. 대신 깻묵 액비는 충분히 넣었다. 그것들이 섞인 물 냄새는 참으로 교묘하다. 시기도 하고, 구리기도 하고, 얼큰하기도 하다.  

늦게 시작한 약주기는 더 늦게 끝났다. 나는 약대를, 아내는 랜턴을 들었다. 불에 비친 고추 이파리들이 살아나는 것이 보였다. 그래 밤바람에 몸 식히고, 이슬에 목 축여라. 내가 뿌리는 물에 샤워가 될는지 모르겠으나, 그래도 찬물 아니냐. 깜깜한 밤중이 되어서야 약주기는 끝났다. 그래도 산골짜기에는 밤이면 찬바람이 분다. 시원해서 좋다. 사람과 초목이 다 좋아할 선선함이다. 

“올 고추 품질은 우라지게 좋겠네.”
그렇다. 목숨을 걸고 영그는 게 무엇이더라도 실하지 않을까. 그저 조금 더 악착같이 버티고 살아남아 풍성해진다면 무얼 더 바랄까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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