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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과 새로운 시작 사이에 들어간 것들

농사일보 조회 수 14365 추천 수 0 2012.02.22 20:08:47
#2012년 2월 22일

 농사를 시작하고 느낀 첫 고통은 고된 노동이 아니라 온 밭을 헤매고 다녀야 하는 걷기였다. 밭이 너무 넓어서가 아니라 같은 곳들을 되풀이하여 오고 가는 수고가 정말 힘들고 고되었다. 물론 전체적인 일에 대한 요량 없이 생각 드는 대로, 필요한 대로, 닥치는 대로 오고 간 탓이 크긴 하다. 그렇다 해도 불가피하게 걸어야 하는 양이 많은 것이 농사다. 그래서다. 한 달 이상을 음악을 듣거나, 영화나 보는 한량 생활을 하다가 밭에서 일이랍시고 하다 보니 금세 종아리가 뭉친다. 자려고 누우면 허리까지 뻐근하다.

 매실가지치기가 급하다는 마음에 나서기는 했으나 덤바우는 여전히 깊은 겨울이다. 양지 바른 곳도 얼어 땅이 단단하다. 볕이 성긴 곳에는 진작 내린 눈이 여전히 희끗희끗하다. 지난 해 끝 무렵 잠시 기온이 올라가 싹이 움트고 말았던 마늘 싹들은 누런빛을 띈 게 죽을 똥 살 똥이다. 한줄기 찬바람에 어깨가 절로 움찔하는 것이 무슨 일인들 할까 싶다. 그저 주머니에 손 찔러 넣고 앙상한 자두나무를 바라보는데 아내, 산이가 한마디 한다.
 “개울에 가자.”



 그렇다. 오늘(20일) 굳이 나선 것은 21일이 된장 담기에 좋은 날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길일인 것이다. 메주를 들고 개울로 갔다. 당연히 꽁꽁 다 얼어붙었다. 미끄러운 길을 끙끙대며 거슬러 올라가자 바위 밑에 얼음장을 뚫고 물이 솟아나는 곳이 있다. 심산유곡 정갈한 물에 산이가 정성스레 메주를 닦는 사이 남편, 들이는 생각한다.
 ‘그래, 길일이라면 막걸리도 좋지. 양미리 구워 한잔, 흐흐.’



 다음 날, 들이는 솥을 들고 개울로 향했다. 걷어두지 않아 꽁꽁 얼어붙은 물 호스를 녹이기 위해서다. 지난 해 기습 추위로 얼어붙은 게 3개월 지났다. 산이의 된장담기에 조금이라도 편하려면 물을 대는 게 시급하다. 그러나 이 일에 두 부부는 한나절을 다 보냈다. 눈발이 희끗거리는 오후에 들어 된장을 담을 수 있었다.





속도전을 펼치는 아내, 산이를 따라 남편, 들이도 바빴다. 불을 대 얻어 온 생선대가리를 삶았다. 이는 장차 거름의 소중한 재료가 될 것이다. 잇따라 솥뚜껑을 뒤집어 놓고 계란 껍데기를 구웠다. 이는 자두식초에 담겨 훌륭한 칼슘비료로 거듭날 것이다. 마지막은 땅속에 갈무리해둔 야콘 뿌리 꺼내기다. 모종하려면 지금 이 때를 놓치면 늦은 판이다. 언제나처럼 들이는 무람없이 덩달아, 산이는 셀 수 없이 많은 할 일에 치이고, 치여 허덕였다. 무심한 눈발마저 자꾸만 굵어져 부부의 마음은 더 급했다. 잔 눈에도 갇히기 십상인 곳, 덤바우를 빠져나오며 생각했다. ‘오늘은 끝과 시작, 그 사이 어중간한 어디쯤일 게다.’ 어쨌거나 올 농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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