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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는 순서

덤바우잡설 조회 수 12003 추천 수 0 2012.03.24 09:15:59
 봄은 우선 호호 백발이 된 겨울을 새벽 삼아 온다. 온 산과 들이 여전히 안방마님, 겨울의 몫임을 선선히 인정하는 자세로 예의바르게, 조신하게 스치듯 들르는 과객처럼 물 사발에 한 모금 입 적시고 짧은 해를 타고 총총 가듯이 온다. 신중하여 감히 언 땅은커녕 허공에 대고 입김 한번 뿜는 법 없이 겨울의 영토에 대한 존경을 잃지 않는다. 어느 계절보다 봄은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길 뿐 결코 제 의지를 관철하려 들지 않는다. 다소곳한 어느 여염집 처녀의 손 매무새처럼 부드럽고, 착하게 그리고 겨울에 진력이 난 모든 것들을 쓰다듬으며 숨을 고른다.



 그러나 봄의 흐린 살 냄새만으로도 산과 들은 바쁘다. 어둔 흙속에 웅크렸던 온갖 들풀의 뿌리는 진작 맺어 두었던 움을 어쩌지 못해 노심초사고, 따스한 햇살에 꽃눈, 잎눈을 부풀려 놓은 나무들도 안절부절 한다. 이렇듯 겨울과 봄의 틈바구니에서 전전긍긍 하는 무리가 있는 반면 바람과 물은 제 세상이다. 꽁꽁 얼었던 물길의 족쇄를 푼 개울물은 제 낯빛이 파래지도록 저 아래로 줄달음친다. 그에 질세라 바람은 흐르는 물에 제 몸을 새기는 걸로도 모자라 허공에 물을 훅훅 흩뿌리기까지 한다. 그런 요동에 덩달아 짝 찾는 개구리들의 아귀 함성이 소란하고, 몸채비도 덜 끝난 산새들은 높이, 더 높은 울음을 청명한 하늘에 금 가도록 운다.



 농사꾼이야 어쩌겠는가? 그저 바라건대 호호 백발 겨울이 망령 나서 이윽고 푸를 산과 들에 된서리로 되살아나지 않기를, 부디 그러기를, 그리하여 짙은 푸름의 여름 속으로 묵묵히 걸어 들어갈 수 있게 되기를. 제 힘으로 되지 않는 일은 다만 바라고,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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